< 註 : 본디 이 감상문은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시작되었기에 서론이 긴 것이었으나 이 블로그에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지만 혹시나 나중에라도 소모적인 논란이 될 까 염려되어 상당 부분을 삭제하고 시작한다 >
은희경의 「빈처」는 아내의 일기를 통해 진행된다. 빈처는 유명한 `현진건‘의 것과 제목이 같다. 현진건의 「빈처」에서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과 헌신적인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각박한 일상의 현실만이 남은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는 「빈처」에는 술 마시기와 글쓰기라는 두 가지 현실 대응방식이 함께 나타난다. 현진건의 「빈처」가 경제적인 빈한함에 허덕이던 아내라면, 여기에서는 남편에 의해 소외되고 세상으로부터도 소외된 척박한 내면의 아내이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나섰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한 손으로는 업은 아이를 받치고 다른 쪽 손으로는 소주를 들고 있다. 그녀는 일상의 현실과 일탈의 꿈 사이에서 서성거린다. 그러나 "고달픈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희망을 주는 한편 그녀를 바로 그 고달픈 삶에게로 묶어놓는 재성이가 엄마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놀 듯이 그래서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상에의 반란은 술 마시기뿐이다. 은희경은 술 마시는 여자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술이 나더러 여편네 아니라고 한다. 대신 혼자 술 마시는 외로운 여자 하라고 한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술은 자신을 남편과 아이에 묶인 일상적 존재에서 실존적 존재로 돌려놓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술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술을 마심으로써 아무에게도 열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술 마시는 그녀에게서 우리는 타인과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 꿈이 좌절된 아픈 여자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그녀와 타인의 연결은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작품이 남편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고 그 안에 아내의 일기가 삽입되어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이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백처럼 대상 없는 글이라 할 수 있는 일기는 남편의 눈에 띔으로써 교신의 기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우연히 보게 된 아내의 일기를 통해 아내의 숨겨진 내면세계와 비로소 만나게 된다. "나는 그녀가 일기를 쓴다는 걸 몰랐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남편인 "나"는 사실 아내에 관해 거의 아무 것도 몰랐다.
아내와 길게 얘기를 나눠본 것도 오래 되었고 둘 사이에는 판에 박은 대화법만이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연애하고 싶다’, ‘불행하다’, ‘외롭다’, ‘허리가 아프다’ 등 그녀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는다. 뿐만 아니라 일상에 갇혀 있는 그녀를 처음으로 본다. 손톱 밑에 낀 고춧가루, 허옇게 닳아 있는 소매 끝, 젖 토한 냄새가 나는 어깨, 밥풀 묻은 가슴. 아내는 남루한 일상을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동안 그런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남편에게 일기는 아내를 비추어주는 거울이고, 아내에게 있어서는 스스로를 비추어보게 하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통해 둘은 삶에 대해 보다 성숙한 인식에 다다른다.
일찍 들어오지도 않고 아내와 가족을 돌보지도 않는 남편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여성의 각성된 자아를 요구하기는 쉽다. 혹은 모든 남성을 매도시킨다든지... 아마 다른 페미니즘 작가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빈처」에 나타나는 남편의 이기주의와 무관심에 대한 비판과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가 여타의 여성주의 소설에 비해 결코 축소되어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은희경은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다만 "간접화된 아이러니"에 기반한 고도의 "연기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소설이 기존의 페미니즘 소설과 구별되는 것도 이 점에 있다. 따라서 자신을 "독신"으로 치부하고 남편에게 "애인"의 역할을 맡기는 아내의 "각색 행위"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남편의 이기적인 행위와 결혼에 대한 회의, 자신을 갉아먹는 절망감으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행위는 그런 의미에서 슬픔과 상처에 대한 일종의 보호막이라고 할 수 있다.
“때때로 나는 똥을 보고 놀란다. 저 흉칙한 것이 내 몸에서 나왔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똥은 엄연하다. 우리 관계는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한참을 보니 신기하게도 저것이 더러운 똥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이제 막 궂고 수고로운 일을 마친 가족 같기도 하다. 나는 똥을 자세히 본다. 내 똥을 자세히 보는 나를 거울 속으로 보니 참 정답다. ”
주인공의 마지막 일기이다. 나는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정말 은희경답지 않은가? 이래서 은희경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똥은 더럽다.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똥이 더럽다하여 몸을 똥으로부터 도피시키는 정신은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국 정신은 더러운 똥과 공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느낀 순간 「빈처」의 주인공은 그만 ‘가족같은 똥'을 정답게 느끼고 만다. 이때 똥은 아내가 서 있는 구질구질한 일상의 비유적 대상이다. 아내인 "나"는 그 일상과 그 안에 서 있는 자신을 "거울보기와 일기쓰기"를 통해 되돌아본다. 이때 똥과 "나"는 더러운 대상에서 정다운 대상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러한 성숙한 깨달음은 다시 남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이의 병간호로 지쳐 잠든 아내의 어수선한 머리를 보며 남편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 일인가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진지함 속의 사소함, 사소함 속에 감춰진 진리... 은희경은 그런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토록 멋들어지게 표현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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