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상 혹은 비평

詩 비교 - 속물과 본질은 백지 하나 차이

by sinsiya 2012. 11. 8.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 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너무 내성적으로 - 편지 15                 -   김용옥



한 남자를 사랑합니다


웃을 때면 섬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남자

작은 보조개가 입가에 떠오는 남자

사유의 그늘을 가지고 있는 남자

비틀스를 자신의 발성으로 즐겨 부를 줄 아는 남자

지나간 수첩 갈피에 

전방의 들꽃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남자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다니는 남자

늘 좌중을 압도하는 남자

술을 마시면 술보다 투명하게 다감해지는 남자

손을 내밀면 누구라고 따스한 어깨를 

기댈 수 있게 하는 남자

혼자 있을 때면 아주 조그맣게 작아져서 

슬퍼 보이는 남자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영혼을 가진

한 남자를 혼자서 사랑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먼 발치에서 외롭게 만드는 남자

영원히 혼자만 가질 수 없는 남자를

장미 가시에 찔린 고통으로 사랑합니다




두 시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이 처음에는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달은 건 이미 수십 여권의 시집을 뒤적인 후였다. 최근 시 중 가장 재밌게 읽은 건 임영조의 <성냥>이었는데 비교대상을 찾는 데에는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실패했다. 그의 시 <파리>-곤충채집2를 발견한 수확을 거둘 뿐이었다. 결국은 맘에 드는 몇 개의 시의 이미지를 노트에 적어서 도서관에서 집어낸 시집들의 그것과 1:1 대응을 시켜보는 고된 작업을 택했다. ‘어머니의 사랑’, ‘향수’, ‘누이’등의 소재들은 흔하게 찾을 수 있었지만 너무 작위적인 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꼭 좋아하는 시만 고를 일이 아니다 싶어서 오규원의 시를 택했다. 이유는 좋게 읽고 나서 다시 읽다가 화가 난 유일한 시였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 시를 가사로 DJ-DOC라는 댄스 그룹이 노래도 만들어 불렀을 만큼 유명한 시였고, 2탄․3탄까지 이어지는 연작시였다. 내가 문제를 발견한 건 2, 3번째 시까지 읽어보고 난 후였다. 일단 ‘한 잎의 여자’라니, 그것도 물푸레나무의 한 잎 같은 여자라니, 과연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다. 먼저 물푸레나뭇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는데 검색을 통해 보니 별 특징은 없다. 


무엇보다 이 시에 불만인 것은 이 시에 그려진 한 여자다. 일단은 우리 또래의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의 전형을 그려보자. “167cm의 키에 48Kg몸무게, 가슴은 빵빵하며 다리는 길고 얼굴은 물론 예쁘며 자기 일은 야무지게 하는 여자”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나도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하지만 이 시의 여자는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병신 같은 여자”이다. 세상에, 이런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희생과 박애의 정신일까? 아니면 오규원 시인과 나의 세대차이인가? 예컨대 소박하며 수동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과 당돌하며 과감한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의 차이 말이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이 여자는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의 ‘詩 그 자체’다. 시인은 여기서 맑고 순결한 자유의 詩를 사랑한다는 솔직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시,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고통 끝에 시 하나를 출산하고 다시 또 고통을 안아야하는 시지푸스 같은 天刑을 오히려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 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는 시의 본질을 말한다. 그러면 물푸레나뭇잎에도 어떤 함의가 있을까?



물푸레나무는 단단하고 무거우며 질기고 탄력이 좋아 건축재, 농기구의 자루, 악기 재료로도 쓰이는데, 이전에는 도리깨를 만드는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요즈음에는 야구방망이 재료로 흔히 쓰고 있다. 나무를 말리지 않아도 쉽게 타므로 땔감으로도 널리 쓰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물푸레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는 효용이다. 


물푸레나무는 ‘물을 푸르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었다. 물푸레나뭇잎이나 가지를 물에 넣으면 너무도 예쁜 푸른색이 나온다. 우리는 물푸레나무의 강한 가지만 보고 그것으로 야구 방망이를 만들지만 어쩌면 물푸레나무의 본질은 숨겨진 푸른색에 있는지 모른다. 물푸레나무의 숨겨진 푸른색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바로 詩作의 행위이며 시인의 태도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시의 본질은 그러나, 어렵게 찾지만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규원의 시는 여자와는 거리가 먼, ‘시인으로서의 고백’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 잎의 여자 2>, <한 잎의 여자 3>를 보면 어쩌면 그냥 ‘여자’에 대한 얘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홈페이지 중 ‘사랑’편에 분류가 되어있는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오규원의 시는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색깔보다 현실적인 색깔이 짙다고 보여진다‘1)는 말에 힘을 입어 다시 읽어보면, 연작시의 2, 3에 그려지는 여자의 모습은 나쁘게 말해 속물 그 자체이다. 첫 번째 시에서 그나마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의 비유로 끝이 났지만 2번째 시에서는 아예 비유가 없다. 나에 의해  ‘시의 본질’로까지 해석되었던 ‘여자’는 더더욱 망가진다. “순대, 떡볶이, 꿀빵” 따위를 먹고 싶다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멍청해지는 여자”를 사랑한다. 이쯤 되면 ‘시의 본질’에게 미안해진다. “손발이 찬” 여자는 더욱 안 좋다. 손발이 찬 여자는 몸이 허약하고 혈액순환이 안 되는 여자이다. 아니면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심지어 자궁에 병이 있는 경우이다. 이런 여자까지 사랑하고 싶다니! 



솔직히 얘기하자, 나름대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나로서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그런 반쪽자리 인간, ‘눈물’, ‘슬픔’같은 청승맞고 신파적인 여성상은 상당히 불쾌하다. 과격한 페미니스트 앞에서 이 시를 읽었다가는 따귀를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여성의 적인 여자” 아닌가? 자신은 아무 능력도 없이 그저 애나 하나 낳고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잘 먹고 잘 입으면 되는 고리타분하며 반동적인 여자이다.


가장 맘에 안 드는 것은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라는 말이다. 나의 반골 기질의 도화선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버렸다. 이런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의 정서, 심리 상태는 어떤 것일까? 정신분석학적으로 살펴봐야 할까? 어쩌면 이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자신이 투사된 여자가 “한 잎의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자기애의 표출이다. 가볍지만 맑고 순결한 자신, 아무 것도 아니고 병신 같고 슬픔 같은 자신에 대한 위로의 표현일 수도 있다. 시인이지만 자기의 시 속의 절대 순수에 빠져들지 못하고 “모카골드”니, “실크 스카프” 따위로 대변되는 세속에 녹아들어가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변명일지 모른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제발 그러길 바란다.

  


이제 김용옥의 <너무 내성적으로>를 보자. 상당히 소녀적인 시다. 나는 평소에 김용옥이라 하면 ‘도올’ 김용옥 선생만 알고 있었는데 동명이인의 여류시인이 하나 더 있었다. 원래는 ‘물푸레나뭇잎’이 아니라 단단한 ‘물푸레나무’ 같은 최영미 시인의 작품으로 ‘오규원의 여자’를 눌러버리려는 계획이었다. 잠깐 최영미의 얘기를 하자면, 그녀야말로 도발적인 여성상의 표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중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슬픈 카페의 노래> 중 “어느 놈 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어떤 게릴라> 중 “녀석과 간음할 생각으로/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같은 당돌하고 충격적인 표현에서 처음에는 반발감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해가 거듭될수록 성숙한 나의 소년적 여성상을 기어이 깨뜨려주었다. 이를테면 ‘한 잎의 여자’ 식의 청승맞고 수동적인 여성취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는 오규원의 정서와 시의식과 최영미의 그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한 잎의 여자>에 대항하기에 가장 좋은 최영미의 시였지만 그녀의 모든 시집을 읽고 또 읽어도 “비교할 만한 시”는 없어서 아쉬웠다.

  


결국 김용옥 시인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최영미를 생각하듯, ‘내편’으로 생각해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 역시 <한 잎의 여자>에서의 여자 (혹은 남자?) 못지 않게 속물적인 남성, 혹은 그런 남성을 사랑하는 여자를 제시한다. 그의 ‘남자’를 살펴보자. “한 남자를 사랑합니다”로 시작되는 1연이 지나면 무려 15행을 통해 11개의 조건이 제시된다. “웃을 때면 섬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남자”라니, 역시 여자는 섬세한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섬세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남자가 생각난다.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하고 가운데나 6:4로 가르마를 탔겠지. 요즘 계집아이들이 좋아하는 취향이 딱 이 모양이다. 창백한 얼굴에 “작은 보조개”가 입가에 떠오는 사내놈 따위는 옛날 어른들에게 계집애 같다며 놀림받기에 충분하다. 김용옥 시인이 언제 지은 시인지는 몰라도 영계 취향인 듯 싶다. 아니, 섬세함은 지성을 말해주고 올라간 입꼬리는 관상학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의 삶의 여유를 나타내기에 웬만큼 나이가 있는 남자를 묘사한 듯도 하다. 


“비틀스를 자신의 발성으로 즐겨 부를 줄 아는 남자”라니, 노래도 잘한다. 아마 저음의 굵은 목소리인 듯 하다. “늘 좌중을 압도하는 남자”라, 최영미가 이렇게 말했었나? 권위란,  “당신이 그와 똑같은 옷 입고/ 똑같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던데, 그런 권위를 갖춘 남자가 술을 마시면 “술보다 투명하게 다감해”진다. 


이 남자의 빈틈은 어디일까? 하지만 여자는 역시 완벽한 남자는 싫어하는 법, “혼자 있을 때면 작아져서 슬퍼보이는 남자”인 그, 역시 대책을 세워놓았다. 여성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그는 진정한 프로다. 드라마 극장이나 만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명문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완벽한 외모에 밝은 성격, 친구도 많고 운동부터 노래까지, 심지어 싸움까지 못 하는 게 없는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는 상황. 그런 남자는 자기가 잘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부족해 보이는 것을 연기한다. 이를테면 ‘난 어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기숙 학원에서 생활을 해서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랐어’ 따위의 대사를 치면서 외롭고 슬픈 듯한 반쯤 그늘진 얼굴로 여자의 모성을 자극한다. 


역시 남자의 조건은 ‘능력, 외모, 노래실력, 권위, 그리고 냉정하면서 때로 보이는 따스함, 고독을 즐기는 멋진 옆모습’인가? 그야말로 순정만화 주인공이군. 게다가 “전방의 들꽃을 간직하고 있는 남자”라니, 역시 군대는 갔다와야 되는군. 


‘이런 놈이 세상에 어딨어’하며 쓰게 웃기 전에 하나의 궁금함이 생긴다. 시인이 사랑하는 남자는 행마다 말하는 이 조건들을 모두 갖춘 한 남자인가? 아니면 그 중 하나를 갖춘 남자인가? 불행히도 전자인 듯 하다. 그러니 “아주 먼발치에서 외롭게 만드는” 것 아닐까. 시의 마지막 연에는 <한 잎의 여자>에서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영원히 혼자만 가질 수 없는 남자”라... 혹시 김용옥의 시에서의 ‘남자’도 어떤 본질을 상징하는 것일까? 자신이 쓰고 싶은 시, 만나고 싶은 시를 말하는 것일까? 나 역시 남성중심적인 사고에 빠져서 시 속의 남자를 그냥 ‘男子’로 본 것일까? 


이 시에 하나의 비상구가 남아있다면 ‘남자를 자신이 쓰고 싶은 시에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도 다르게 읽힌다. 섬세한 시, 작은 보조개를 떠오게 하는-즉 행복을 주는-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 독자로 하여금 참여케 하는 시, 전방의 치열함 속에서도 피어있는 낭만을 노래하는 시, 바람처럼 자유로운 시, 그러면서도 우리를 압도하는 시, 다감하며 의지가 되고 영혼을 지닌 그러한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열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시를 평생에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어도 시인으로서는 엄청난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를 쓰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따라서 “영원히 혼자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시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인위적으로 해야할 것이 아니다. 거칠게 다가가야 할 것이 아니다. 서투른 열정은 “가시에 찔린 고통”을 줄 뿐이다.


김용옥 시인이 다른 시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다. 맞다,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와 김용옥의 <너무 내성적으로>이라는 시의 공통점을 하나 찾았다. 다른 시들은 모두 좋았지만 유독 나에게 걸린 작품 하나씩에 보인 “속물적 이상형”이 문제인 것이다. 오규원은 ‘속물적 여성’, 김용옥은 ‘속물적 남성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속에 혹시 담겨있을지 모른 비유와 시인으로서의 시정신이 작품에 투영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내 나름대로 재해석해보았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가 혼란스러워졌으니 수면 부족 탓은 아니리라. 한 번은 오규원의 시에 있는 여자가 ‘아 진짜 사랑스럽다’고 느껴진 적이 있어 처음부터 다시 글을 써야하나 싶기도 했으니 나 또한 내 생각에 자신이 없나보다. 어쩌면 ‘순응주의에 반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남아있는 내가 더 속물적인 것인지... 



시인이 사랑하고 싶지만 영원히 혼자만 가질 수는 없는 그 ‘님’이란 것. 때로는 神이기도 하고 남자 혹은 여자로도 나타나지만 결국은 본질에 대한 접근이다.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시인은 시를 쓰는가? 그냥 “내 이상형은 34-23-35의 몸매에 눈은 김희선, 코는 이영애, 입술은 김혜수...”이런 식으로 쓰는 것과 시적인 표현은 뭐가 다른가? 아니면 아름다운 여자 그 자체야말로 하나의 시 아닌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라고 오규원은 얘기했다. 2)


연금술 같이 허망할 지도 모르지만, 금을 얻기 위해 일생을 바쳐오다 삶의 종점에서 불 속에 타오르는 살라망드르를 보고 기쁨에 잠겨 죽은 누군가의 길을 걷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 돈을 주고 금을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금의 본질은 떠나있다고 보는 것이 시인이다. 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연금하듯 만드는 것이다, 토해내는 것이다. 아직도 나에게 시는 어렵다. 


속물과 시인 사이... 위에 소개한 두 편의 시는 한 속물의 이상형 고백일 수 있고 한 시인의 시에 대한 자기 고백일 수도 있다. 어떻게 읽든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쓰여진 시는 이미 시인의 소유에서 벗어난 시 자체이다. 속물과 시인의 사이는 따라서 백지 한 장 차이이다. ‘쳇, 이거 순 속물이었잖아?’라거나 ‘와, 역시 시인은 시인이군...’하는 두 가지의 선택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다. 나는 어느 쪽일까? 글쎄. 아무래도 전자쪽일게다. 시인도 시를 먹지 않고 밥 먹고 살고 시인도 돈벌기 위해 일도 하고 출근도 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시인도 ‘시적인’ 것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실수로 튀어나온 것이 바로 위의 두 시가 아닌가 싶다. 



<註 : 위 글은 치기어린 대학 시절 쓴 잡문이다>


1) 이진우의 <오규원론>에서 인용.

2) 오규원의 <버스안에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