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스타 안정환 총정리! 총정리 팟캐스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꽃미남 축구선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반지의 제왕으로 기억합니다. 아주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잘생김’으로 유명했죠. 학교 행사 때 여학생 장기자랑 1등 상품이 안정환과의 일일데이트였을 정도입니다.
정글의 법칙으로 시작해서 아빠 어디가, 청춘 FC, 우리동네 예체능, 인간의 조건, 마리텔, 나오는 예능마다 뻥뻥 터졌습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고정 MC를 시작한 이후 이제 예능계의 블루칩이 되었죠. 요즘에는 패키지로 세계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안정환을 그저 웃긴 아저씨, 예능인, 혹은 왕년에 공 좀 찼던 축구선수 정도로 알고 있죠. 그런데 안정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월드컵 역사상 마지막 골든골의 주인공이 바로 안정환입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넣으며 반지의 제왕이 되었죠. ‘판타지스타’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입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축구선수를 뜻하죠. 이런 유형의 선수는 감독을 잘 만나야 합니다.
로베르토 바조, 델 피에로, 지단, 마이클 오언 같은 선수를 판타지스타라고 합니다. 환상적인 플레이와 함께 영웅 본능을 지니고 있어서 혼자 경기를 뒤집기도 합니다. 넓은 시야와 함께 기가 막힌 패스, 그리고 수비 압박을 견디며 골도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유일한 판타지스타가 바로 안정환입니다. 레전드인 차범근, 박지성도 최고지만 판타지스타 유형은 아니죠.
1997년 9월 5일로 거슬러 올라가봅니다. 추계대학연맹 결승전, 안정환의 아주대와 홍익대가 경기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안정환은 유니버시아드 경기를 위해 이탈리아에 갔는데 귀국하자마자 바로 이 경기장으로 옵니다. 2:2 동점인 상황,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안정환이 그라운드에 투입되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안정환이 오른발로 역전골을 넣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1분 만에 수비수 3명을 제치고 또 골을 넣습니다. 팀은 5:2로 승리했습니다.
안정환, 이동국, 고종수, 이 세 선수는 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삼인방이었습니다. 안정환이 대우 로열즈에 입단하고 경기에 출전하자 2만 5천석의 부산 구덕 경기장은 복도까지 꽉 차게 됩니다. 3만이 넘는 관중이 안정환의 멋진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를 보려고 모여든 것입니다.
200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 A에 진출합니다. 임대조건이긴 했지만, 기회의 땅인 줄 알았던 이탈리아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직 한국 팬들은 해외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안정환의 유니폼을 사지도 않았죠. 페루자의 구단주는 실망했고 상업성이 없는 안정환의 입지는 좁아집니다. 그런 가운데 4경기 연속 득점을 합니다. 페루자 감독은 “굉장한 재능을 가진 안정환에게 많은 기회를 줄 수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죠.
안정환은 이탈리아의 인종차별과 멸시를 직접 겪으며 힘들어했습니다. 그럼에도 리그에 적응하며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 주간 베스트 11에 두 번 선정됩니다. 다음 해에는 등번호 10번을 달게 됩니다. 아시죠? 10번은 에이스의 번호입니다. 게다가 완전 이적까지 추진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적은 무산되고 안정환은 임대 신분으로 남게 됩니다. 벤치에 주로 앉아있던 안정환은 2002년 월드컵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장과정
안정환이 1976년 파주에서 태어날 때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성을 땄는데 어머니도 안정환을 돌보지 않았어요. 안정환은 외할머니와 함께 흑석동 판자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당시 굿판을 자주 벌이던 한강둔치에 가서 굿이 끝나면 남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것도 없는 날은 무와 배추를 훔쳐 먹었죠. 입을 옷이 없어 남의 집 빨래도 훔쳤습니다. 학용품 살 돈은 삐라를 신고해서 마련했습니다.
어린 시절 안정환이 부러웠던 건 차두리였습니다. 유명한 축구선수 차범근을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이었죠. 하루는 외할머니에게 100원만 달라고 합니다. 왜냐고 묻자 “나가서 아버지를 사오겠다”고 대답했죠. 얼굴도 못 본 아버지, 노름판에 빠진 어머니……. 안정환은 ‘아빠 어디가’라는 예능 프로에서 아들 리환이가 저녁 재료를 구하려고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죠.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달리기만 빨랐을 뿐 축구는 해본적도 없는 소년 안정환은 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갑니다. 이모 집에 얹혀살던 4학년 때의 일입니다. 운동하면 배가 빨리 꺼질까봐 반대했던 외할머니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축구부에 들어가면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을 들은 안정환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축구를 시작했지만 배고픈 삶은 이어졌고, 1년에 10번도 넘게 이사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수원으로 이사 가니 학교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학교 창고에서 혼자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어린 안정환의 정서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축구부 선배들의 구타는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축구부를 이탈했다가 돌아오기를 거듭했죠. 남서울 중학교 재학 시절 안정환을 지켜본 서울공고 박윤기 감독은 “순발력과 슈팅이 좋았지만 몸이 작아서 힘이 부족했다”고 평가합니다.
‘승승장구’라는 프로에서 안정환은 고등학교 입학에 대한 얘기를 전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주장과 부주장은 인문계 진학이 확정됐고, 안정환도 축구명문고에서 러브콜이 왔습니다. 하지만 함께 뛴 친구들은 낙오자가 되는 상황이었죠. 안정환은 무려 14명의 동료 선수들과 함께 입학한다는 조건으로 서울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대표팀에 뽑혔는데 이때 처음 오렌지를 먹어봤어요. 한창 먹성 좋을 때였지만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오렌지를 몰래 가방에 싸옵니다.
안정환은 합숙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돈을 벌었습니다. 막노동도 하고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도 했죠. 목동역을 자기 손으로 지었다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나이트 알바를 해서 과일도 잘 깎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명문대의 스카우트 제의가 옵니다. 축구도 야구도 잘 하는 선수는 고대나 연대로 가죠. 그런데 여기서도 안정환은 동료를 선택합니다. 함께 입학하는 조건으로 아주대에 진학합니다.
무엇이든 거침없이 대충 정리해서 배달해 드리는 내 손안의 지식인, 총정리! 이번 67화의 주제는 ‘판타지스타 안정환’입니다.
- 반지의 제왕으로만 알고 계시죠? 아니면 예능인으로?
- 세계 축구 역사상 판타지스타는 많지 않아요. 그게 안정환입니다.
- 귀티나는 안정환,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짠내만 풀풀납니다.
- 실패한 선수라고요? 그는 태극마크를 위해 다 포기했는걸요?
- 49분의 방송으로는 부족합니다. 구글에서 '안정환 멘탈'을 검색하세요.
월드컵 역사상 마지막 골든골의 주인공이 바로 안정환입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넣으며 반지의 제왕이 되었죠. ‘판타지스타’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입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축구선수를 뜻하죠. 이런 유형의 선수는 감독을 잘 만나야 합니다.
로베르토 바조, 델 피에로, 지단, 마이클 오언 같은 선수를 판타지스타라고 합니다. 환상적인 플레이와 함께 영웅 본능을 지니고 있어서 혼자 경기를 뒤집기도 합니다. 넓은 시야와 함께 기가 막힌 패스, 그리고 수비 압박을 견디며 골도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유일한 판타지스타가 바로 안정환입니다. 레전드인 차범근, 박지성도 최고지만 판타지스타 유형은 아니죠.
안정환, 이동국, 고종수, 이 세 선수는 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삼인방이었습니다. 안정환이 대우 로열즈에 입단하고 경기에 출전하자 2만 5천석의 부산 구덕 경기장은 복도까지 꽉 차게 됩니다. 3만이 넘는 관중이 안정환의 멋진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를 보려고 모여든 것입니다.
200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 A에 진출합니다. 임대조건이긴 했지만, 기회의 땅인 줄 알았던 이탈리아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직 한국 팬들은 해외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안정환의 유니폼을 사지도 않았죠. 페루자의 구단주는 실망했고 상업성이 없는 안정환의 입지는 좁아집니다. 그런 가운데 4경기 연속 득점을 합니다. 페루자 감독은 “굉장한 재능을 가진 안정환에게 많은 기회를 줄 수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죠.
안정환은 이탈리아의 인종차별과 멸시를 직접 겪으며 힘들어했습니다. 그럼에도 리그에 적응하며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 주간 베스트 11에 두 번 선정됩니다. 다음 해에는 등번호 10번을 달게 됩니다. 아시죠? 10번은 에이스의 번호입니다. 게다가 완전 이적까지 추진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적은 무산되고 안정환은 임대 신분으로 남게 됩니다. 벤치에 주로 앉아있던 안정환은 2002년 월드컵을 맞이하게 됩니다.
선수 시절
1) 전반전
월간 축구 전문지 “베스트일레븐”은 K리그 역사 전체에서 최고의 ‘별’ 다섯 명을 뽑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 1999년의 안정환을 평가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뛰어난 드리블과 탁월한 개인기로 페널티박스에서 수비수 2~3명 정도는 가볍게 제쳐내는 안정환의 플레이는, 그때까지 국내에서 이어져오던 스트라이커에 대한 개념을 뒤흔들만한 것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 여기에 스트라이커의 개념까지 바꿨던 1999년의 안정환, 아직도 그 시절의 그를 떠올리면 엄지손가락이 먼저 알고 올라간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외모가 신드롬을 가중시켰을 뿐 절대 잘난 외모 덕에 인기를 누린 선수는 아니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잘생긴 외모가 안정환의 축구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됐고, 그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은 안정환이었다고 말합니다.
아주대학교를 졸업한 안정환은 1998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합니다. 미용실 갈 시간도 없고 귀찮아서 길렀다는 말총머리를 찰랑거리며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데뷔 첫 해에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뽑혔죠. 신인왕은 이동국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14골을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우승팀이 아닌데도 MVP를 차지합니다. 대우가 파산하면서 구단은 부산 현대 아이콘스로 이름을 바꾸죠. ‘리그 MVP나 득점왕을 차지하면 안정환의 유럽 진출을 추진한다’는 대우 로얄즈와의 계약을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2000년, 결국 반 시즌을 더 뛴 후 유럽 이적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안정환은 반 시즌 동안 10골을 넣었고 해외 진출을 추진합니다. 당시만 해도 유럽 최상위리그에서 변방의 하위리그를 뛰는 한국 선수를 받아줄 구단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의 임대선수가 됩니다. 하지만 한국 팬들은 해외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위성방송을 보는 사람도 없었고 해외 팀의 유니폼을 구매하는 문화도 없었죠. 돈이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구단은 안정환을 쓰지 않습니다.
프로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안정환은 인종차별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벽과 얘기했다고 하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위 리그였던 K리그 출신의 임대 선수가 세리에 A의 주전으로 뛸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체 출전으로 시작한 안정환은 4골과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주전 자리를 차지합니다. 다음 해에는 에이스의 백넘버인 10번을 달게 됩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합니다.
2002년에 태어난 친구들은 지금 중학교 3학년인가요? 대한민국의 2002년은 정말 뜨거웠죠.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은 데에 이어, 안정환은 이탈리아와의 16강에서 골든골을 넣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절정의 순간이었죠. 거짓말 보태자면 북한까지 함성이 울렸을지 모릅니다. 실신한 사람도 많았고 제 일행은 강남역에서 뻗을 때까지 마셨죠. 그리고 안정환은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전설이 됩니다.
2) 후반전
그 골든골로 인해 안정환의 소속팀인 페루자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축구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객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한국에 졌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죠. 안정환이 속한 페루자의 구단주는 공영방송에 나와 안정환에게 인신모독을 하며 “당장 방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립서비스를 종종 해주던 감독도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었죠. 이탈리아에 오면 마피아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습니다. 실제로 안정환이 1년 치 연봉으로 산 고급차가 완전히 박살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곧 안정환의 몸값이 10배 올랐다는 뉴스가 유럽에 퍼졌습니다. 가우치 구단주는 공영방송은 물론 KBS 9시 뉴스까지 나와서 사과를 하며 안정환의 복귀를 요구했죠. 하지만 안정환은 이미 이탈리아에 정이 떨어졌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안정환의 에이전트와 부산 구단이 병크를 터뜨립니다. 잉글랜드로 가서 블랙번을 만나 단독 협상을 시작한 것이죠. 같은 시기에 안정환의 소유권을 가진 페루자는 볼튼을 만나 협상을 진행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안정환이 이 상황을 모르고 에이전트였던 안종복만 믿었던 것이죠. 그리고 영국에서는 안정환의 이적 뉴스가 발표됩니다. 블랙번으로 간다, 볼튼으로 간다는 뉴스가 같은 날에 발표된 것이죠. 빡친 페루자는 FIFA에 국제 소송을 제기했고, 대한축구협회와 부산 구단은 구경만 했습니다. 소송 결과 안종복은 에이전트 자격 영구 박탈, 안정환은 36억을 페루자에 지급해야 했죠. 하지만 페루자에서 2년간 받은 13억 원의 대부분은 어머니 도박 빚으로 이미 나갔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잘 나갔던 안정환이지만 돈이 없었어요.
그런 안정환에게 다가온 것은 일본의 연예기획사, ‘PM’이었습니다. 빚을 청산해준 후 안정환의 소유권을 사서 3년 간 J리그에 임대를 보냈죠. 안정환을 통한 광고 수익과 예능 출연료도 다 갖기로 했습니다. J리거가 된 안정환은 시미즈에 이어 요코하마에서 뛰며 2004 시즌에 팀을 우승시킵니다. 25경기를 뛰는 동안 팀 최다인 12골을 넣었죠. 계약에 따라 시즌이 끝나면 예능에 나오고 광고를 찍었습니다. 시즌 중에는 축구선수로, 시즌이 끝나면 연예인으로 일을 시킨 PM은 3년 동안 100억을 벌었습니다.
빚을 갚은 안정환의 나이는 이제 서른이 되었고 나고야에서는 30억이 넘는 연봉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안정환은 유럽에서 뛰겠다며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 프랑스의 FC 메츠에 연봉 8억으로 이적합니다. 이후 분데스리가를 거치는데 이런 행보는 2006년 월드컵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안정환은 높은 연봉을 받고 클럽에서 뛰는 것보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 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독일월드컵, 축구계의 기득권 전문가들은 안정환의 체력 문제가 심각해서 풀타임을 뛸 수 없고 조커로나 기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안정환은 토고전에서 그들의 콧대를 꺾어버립니다. 후반 17분에 터뜨린 안정환의 멋진 중거리 슛은 한국의 역전승을 일구어냈습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원정에서 승리한 것이고 그 경기의 주인공은 안정환이었습니다.
독일월드컵을 마친 안정환은 2007년 수원 삼성에 입단하며 K리그에 복귀합니다. 그 시절, 2군에서 연습경기를 하다가 가족을 모욕한 상대팀 팬과 충돌했던 사건은 유명하죠. 유명 운동선수가 욕을 먹는 건 흔한 일이죠. 비주류였던 안정환은 기득권의 비난과 모욕도 잘 견뎌왔습니다. 하지만 자기 부인에게 성적 모욕을 가하는 욕설은 참을 수 없었죠. 관중석에 가서 충돌한 후 벌금 처분을 받고 사과문도 썼습니다. 하지만 안정환의 가족을 욕한 팬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후 부산 아이파크에 이적해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한 안정환은 이후 J리그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중국을 거쳐 중국 리그의 진출합니다. 3년 동안 65경기에서 18골을 넣은 안정환의 별명은 ‘다롄의 왕’이었습니다. 무릎 부상으로 경기를 뛰지 못한 적도 있지만 리그 최고 용병 1위에 선정될 정도로 활약을 펼쳤죠. 그리고 2012년 1월 26일 소속사는 판타지스타 안정환의 은퇴를 발표합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우승후보 팀의 수비진을 헤집고 다니고 절묘한 킬 패스와 함께 아름다운 슈팅을 보여준 안정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다양한 기술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명 ‘안느 턴’으로 수비수를 농락했고 킥 페인팅으로 수비수 여럿을 쓰러뜨린 후 골 그물을 가르던 전성기 시절 플레이는 한국 선수 같지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전에서 보여준 예술적인 칩샷도 기억납니다.
이영표 해설위원은 안정환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축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작을 선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무엇보다 안정환의 장점은 큰 경기에 강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한 정신력과 승리욕입니다. 상대가 거친 플레이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기술을 펼쳤고 조커로 출전하면 경기 분위기를 바꿔버렸습니다. 2002년 3, 4위전이 끝나고 모두가 웃고 있을 때 라커룸에서 혼자 씩씩거리며 화를 낼 정도로 승리욕이 강했습니다.
비주류였던 안정환을 축구계와 국내 언론은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정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죠. 레전드급 축구인과 해외 언론은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테크니션, 그 중에 판타지스타 성향을 가진 선수를 여럿 봤다. 분명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팀플레이에 맞춰지는 단순한 플레이에는 호흡을 맞출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판타지스타는 감독이 활용할 줄 모르면 미움을 받거나, 조용히 사라지기 마련이다. 한국과 경기를 했을 때 AC 페루자에서 뛰고 있다는 안느를 봤다. 우리 팀의 누구(델 피에로)와 무척 닮았더라. 그러나 ‘저 선수를 다룰 만한 감독’이 있는지 모르겠다.” - 조반니 트라파토니(UEFA 주관 모든 대회를 우승한 레전드 감독)
“안정환은 정말 헌신적인 선수다. 팀의 공수 밸런스와 볼 흐름을 위해 경기 내내 정말 헌신적인 플레이를 했다.” - 프란츠 베켄바우어(2002년 포르투갈전)
“이탈리아 골대에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를 왜 빼겠는가?” - 거스 히딩크(2002년 한일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왜 안정환을 교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정말 아름답다. 안느는 아름다운 플레이어다.” - BBC(두 골 몰아친 경기 해설 중 )
“안은 헤딩을 전혀 하지 않았던 선수에서 1년 만에 유럽에서 가장 멋진 헤딩 골을 만드는 선수가 되었다.” - ESPN, 유럽리그 이 주의 골 중에서.
“안정환은 내가 본 아시아 선수 중 가장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요한 크루이프를 보는 듯 했다.” - 펠레
“안정환은 스트라이커가 아니다. 심지어 같은 위치에서 뛰는 델피에로도 원톱으로는 경기에 나서지 않는다. 쓰리톱을 사용한다면 조재진과 이동국을 최전방에 포진하고 차라리 중앙의 안정환을 쳐진 스트라이커로 놓겠다. 박지성과 안정환 중 프리 롤을 선택하라면 나는 안정환을 선택하겠다. 박지성은 세계적인 선수지만 안정환만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할 수는 없다.” - 움베르토 코엘류, 前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포털, 초록색 창 말고 외국 포털에서 “안정환 멘탈”을 검색해보세요. 분량 때문에 생략한 다양한 일화를 볼 수 있습니다. 가족과 주변인 때문에 돈으로 고통 받은 일, 그러면서 약자를 위해 기부한 일, 안정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축구로 명문대에 가고 국가대표에서 공격수를 하려면 돈과 빽이 필요합니다. 탄탄한 부모의 전폭적 지원은 기본이죠. 그 중 아무 것도 없던 안정환은 축구계와 언론을 통해 철저히 따돌림 당합니다. 대표팀에 오르지 못했고 TV 중계진은 그를 비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주류였던 박지성을 살린 것은 축구계가 아니라 히딩크 감독이었죠.
어려운 형편을 많이 원망했다는 어린 시절, 부모의 빽이나 학벌하나 없이 실력으로 버틴 선수 시절, 그는 잘생긴 외모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많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의 발에 공이 닿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죠. 우리의 판타지스타가 그라운드에서 야생마처럼 뛰는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능 프로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